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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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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프로스트의 책을 접하게 된것은 (etkbc님이 책을 보게 된 동기를 적으라는 것을 보고) 제가 즐겨듣는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  '일상, 하나님의 신비(Eyes Wide Open; seeing  God in the Ordinary )'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이다.  기존에 삶의 모든 부분에 임재하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그리고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일 하심(역사하심)을 바라보는  눈을 띄워주는 책으로 '계시'라는 것이 꼭 이상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는 것(일종의 직통계시)이라 상상하며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던 나의 생각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계시이며 들의 풀 한포기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고 또 자라나는 것, 그러한 과정속에 하나님이 돌보시는 속석이 드러나는 그분을 품성을 드러내어 보여주심 역시 계시라는 '자연계시'라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던 책이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도움을 주는 책이었기에 '위험한 교회'가 교회에 도서관에 비취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 부담이 되긴 하였지만...

마이클 프로스트의 "위험한 교회"를 볼때 나를 당황하게 하였던 것은 딸기어멈님이 이야기 했던것 용어의 해석이었던것 같다.  "유수자"라는  말은 교회를 다닌지 몇년이 된 나에게 처음 접해보는 것이라.  성경에 어느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던가?  하고 찾아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유수자라는 표현은 없었고, 또 국어 사전에도 '유수자'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과정에 '유수자'에 대한 클루를 찾은것은 영어단어 'exile'에서 였다. 그 단어를 찾고 나서 하나 하나 맞춰져가는 그림들은 마아클 프로스트가 그의 책 위험한 교회를 통해 하려고 하는 이야기 방을 열어나가는 key가 되었다.

- exile [|eksaɪl ; |egzaɪl]  
1. 망명; 추방, 유배
2. 망명자; 추방된 사람
3. 망명을 가게 만들다; 추방하다

망명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성경에서 보면 구약 역대서에 나오는 남유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가 되는 시기를 나타낸는 말이다.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포로이 시기가 지나고 1차 포로귀환, 2차 포로귀환 등의 이야기와 에스라 느헤미아 등의 시기에 성전재건과 성벽재건의 시기들의 사건들을 가끔씩 설교말씀을 통해 들었던것 같다. 그 마저 기억나지 않는다면 유년 주일학교때나 들었을 법한 다니엘과 세친구 이야기 이야기가 포로된 시기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들이다.
그러면 그러한 유수자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어떠한 관련이 있고 왜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들을 다른 내용의 책의 제목을 '위험한 교회'라는 도발적인 제목까지 들어 이야기 하려고 하였을까?
이책의 유수자들은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포로자들로 해석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느브갓네살의 침공에 의해 바발론의 포로가  된자들, 포로가 된 땅에서 그들은 망명자요, 본토 아비땅(하나님의 땅)에서 이방땅으로 강제 이주 되어 살아가는 포로생활을 하는 자들이었다.

포로된 바빌론의 땅에 살면서 그땅에 동화되어 바빌론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삶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포로자, 그들은 바빌론의 가치와 권세가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었고 또 위험한 사람들이었던것이다.
물론, 포로귀한의 역사를  보면 포로로 잡혀갔던 모든 유다의 포로들이 고래스왕의 귀환칙령 때 귀환한것은 아니었다.  포로된 자들중 소수만 귀환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포로기간중 많은 사람들은 바빌론의  삶에 안주하여 스스로가 포로 되었다는 (다시 말해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의식을 잃어 버리고 바빌론의 가치와  바빌론에서의 삶이 주는 안락에 동화 되어 버린것이아닌가 싶다. 포로된 자들중 돌아온 소수의사람만이  바빌론의 삶은 포로의 삶이라는 포로의식(이스라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즉 그들의 본향을 그리면 그 삶을 소망하며 역경속에서도 돌아가고자 하는)이 살아 있는 '유수자'가 아니었나 싶다. 바빌론속에서도 본향을 그리며 포로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불이익 속에서도 감당케 하는 능력이 임하였고 그러한 능력은 바빌론의 세계관이 감당치 못하는 위험함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러한 '유수자'를 오늘날의 삶으로 대입해 본다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이 바빌론의 포로의 삶이라고  표현하면 너무나 급진적인것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우리의 현재 이 시대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포로가 되어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본향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 세상이 주어주는 안락속에 포로되어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 버리고 이 땅에 안주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이세상이 이끌어가는 가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것이다.  예를 들어 '돈'으로 메겨지는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맞추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복음을 살아가다는 것은 현 시대의 '유수자'의 삶이 아닐까?

포로된 '유수자'들은 바빌론에서 살아가다보면  유다의 가치와 바빌론의 가치가 충돌하는 부분에서 과감히 유다의 가치를 위해 본인의 불이익을 즐겨 감수했었던 것을 볼수 있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왕국에서 주어주는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며 본인의 본인됨(포로된 본향을 향하는 뜻)을 부인하지 않은것처럼, 우리의 현재의 삶들이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충돌되는 세상가치에 대해서 본인이 받게될 불이익을 감래하면서  이것은 안된다는 것을 외칠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사람이 되어지는 것이면 그러한 공동체인 교회가 '위험한 교회'가 아닐까.

책 내용의 정리는 '딸기 어멈'의 글을 참고 바란다
.
우리의 공동체 안에는 이러한 위험성을 잃어버린지가 오래된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포로됨을 잊어버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은 나만의 고백만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안타까움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고통의 외침이지만 그 결국은 새생명의 탄생을 위한 일갈이다. 유수자들은 세상이 제공한는우상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실한 본향을 향하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딸기삼촌도 성경책 주시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