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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적인 복음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우연이라고 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만남을 통해 교재를 하고 있는 목사님중 한분이 있다. 그 목사님은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한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으신듯 하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글을 쓰고 또 가까운 목사님들과 그것에 대해 서로 나눈다고 한다.

 

그분이 보내주는 강해지를 통해 나의 묵상가운데 "복음"을 원색적으로 안다는것(전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원색적이라는 말을 처음들었을때, 내가 가지고 있는 원색적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원색적으로 비난한다...'말에 쓰이는 것 처럼 '아주 맹렬히'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원색적인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의아했던것이 사실이다.

 

그 목사님이 전하는 '원색'이라는 것은

원색[原色]

으로 그 본디의 빛깔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복음을 이야기 할때

'복음이라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전함받고 전해 준 복음입니다.

성경대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라고 말하고 그것이 복음의 전부라고 내게 설명해 주는 이도 있었다.

물론, 그말이 정답이고 그렇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그것을 그냥 주입식으로 암기 하는 것이 그 전부인것처럼 이야기 하는 이들을 적잖게 만나게 될때면 가슴이 탁 막히고, 정말 그 복음을 넓고 깊고 높은 것들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맛이라도 보고 난 후 그것을 다시금 성경말씀으로 돌아와 로고스의 말씀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은 이런것이 나의 교만일까 하는 부담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원색적인 복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들의 설교에서 조차 복음을 듣는 이로 하여금 알수 있도록 풀어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을때가 있긴 하지만, 특히 원색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사실 우리가 그것을 모두 풀어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접근이긴 하지만...

그 복음이 가진 본디의 빛깔을 전하다가 전하는 어려움이 있어 퇴색되어 버릴수도 있고, 의도되지 않은 다른 불순물이 첨가된 색을 전하기도 하며, 전하기 쉬운 쪽만 떼어 내어 그것이 전부인양 전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빛깔을 더 내고자(?) 무엇인가를 가미하려고 노력하기도 하는것 같다.

그렇지만 원색적인 복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건강(?) 한것 같아 보이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원색적인 복음을 위하여 다소 위험해 보이는 그 복음과 비 복음적인 것의 경계선인 Edge까지도 담대하게 전하려고 하는 설교를 들을때면 전율이 느껴진다. 그러한 감동은 눈이 아리도록 선명하고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한 화면들로 뇌가 감당해 내기 어려운 현기증이라고 해야 하려나...

 

성경말씀을 묵상함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의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 품 속에서의 참안식을 통하여 복음의 원색들이 내게 배어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복음전도자'로서의 나의 삶을 통하여 그 원색들이 배어나기를 소망한다.

 

...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인근에 그러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사명을 가진 분이 쉽게 찾아 뵙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가까우나 멀리 있으나 자주 보지 못하지만 왠지 멀리 떨어지면 더 아쉬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