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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순응과 고도순화

등산에 대해 잘 모른다.  한국에 살때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르는 정도를 등산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전에 다른 분의 블로그를 보면서 산을 좋아하는것이 어떤것일지에 대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적이 있다.

그중 "climatizing" 이라는 글이 생각이 난다. 
높은 산에 올라갈때는 고소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등산을 신자의 삶의 여정에서에 비유해서풀어나간 글은 아직은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하는 여렴풋한 그림을 제공해 주었다.
(http://shiker.tistory.com/entry/Climatizing)
신자의 삶이란 등산에서 만나게 되는 고소와 어떤면에서 유사한것이 아닐까? 평지에서 누리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하면서 생활하기에는 지상의 1/3 밖에 되지 않는 산소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을듯 하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적응해 나가는 기간이 어떻게 보면 climatizing이 아닐까? 

Climatizing에 대해 궁금하여 이곳 저곳을 찾아보다가 "고소순응"과 "고도순화"라는 단어를 알게되었는데 참으로 재미있어서 간단히 적어 본다.


먼저 고소순응은 고소 환경에 익숙하도록 고소에 순응(順應)하는 훈련이나 방법을 말한다. 고소순응은 일정기간 동안 한시적인 효과가 있으나 고소의 환경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을때에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후에 사라져 버리게 된다.
반면 고도순화(高度馴化)는 고소순응이 오랜 기간동안 지속 고정화되어 자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인 적응을 하게 되는 경우다. 페루, 네팔, 티벳 등지의 고소에서 정착해 생활하는 고산족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신자의 삶이 훈련을 통해 이루어져 보이기도 하겠지만 어떠한 훈련들은 특정 상황이 없어지면 마치 고소순응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예를들어 내 삶의 어떤 시점에서 신앙적인 환경과 동떨어져 버린 상황에 처해 버리면 그렇게 훈련된 것들이 점차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이곳 미국에 유학을 오면서 예수를 믿고 신안생활을 시작하던 분중에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생활이라는 환경이 주어지졌을때 그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는 분들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듣게된다(물론 그 환경과 상관없는 분들 역시 없는것은 아니지만...) 신자의 삶이 고도순화처럼 내게도 예수의 피로 유전되어 고착화 되어져 순화 되어야 하는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자손에게 유전되듯이 예수로 부터 유전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다.

또 하나 고도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해의 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고도순화가 이루어진 고산지대 사는 이들에게는 고산지대에서 생활하는 것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이 당연시 될것이다. 티벳인들에게는 지상에서 고지로 올라와 몇걸음 걸을때마다 힘겨워 하며 숨을 헉헉거리는 이들이 어떻게 보일까?  이상해 보일것이며 마치 코미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해가 안될것이다.  세상의 많은 위치에서 엘리트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한계는 그들 스스로가 엘리트가 아닌 이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는 세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엘리트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크게 다른것 같지 않다.

전에 복음에 대해 설명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복음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어릴적 부터 안정된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아주 당연하여 설명을 더하면 군더더기가 될정도로 이해가 되는 논리적인 전개이지만 비복음적인 환경속에서 자라난 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뭔가가 한, 두 스텝을 더 짚어서 넘어가야 이해가 될듯 한데 그런 것들을  비약해 버린듯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진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아주 탕자적인  Background를 격어온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욱 친숙하게 들리는것 같다.